추억(追憶)
요즘처럼 계절이 바뀌는 계절! 옷장을 정리하다 하염없는 추억 속으로 빠져들 곤 한다. 내몸매가 착하게 변신하기 전에 즐겨 입었던 스커트, 내 라인을 자랑스럽게 살려 주었던 스판 진. 배 나오기 전엔 나름 소화했던 현란한 쫄~티… 몇 계절을 옷장 속에서 독수공방하다가 추억의 일기장으로 남게 되는 운명! 이런 뼈아픈 경험들 한 두 번은 해 봤으리라! ‘나도 한 때는…’ ‘그래도 그 시절에는…’ 과 같은 증인 없는 무수한 무용담들과 함께…
그래서 늘 옷장 속은 늘 입지도 않으면서 북적거리는 추억들로 가득하다. 서로의 몸을 부비면서 추억을 이야기하고, 주인님의 살이 하루 빨리 정상을 되찾기를 밤마다 기도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가끔 이루어져 반짝 세상의 빛을 보기도 하고, 때론 수 년 공양이 물거품이 되어 사늘한 재활용 상자로 매몰차게 직행하기도 한다. 그 때쯤이면 아마도 그 추억도 빛이 바래 유치해졌거나, 십중팔구는 새로운 추억이 옛추억에 덮어쓰기를 실행한 경우이다.
여고시절 입던 교복 걸어놓고 졸업 후 수년을 사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어느 순간 사라진지도 모르게 사라졌을 때, 찢어진 청바지가 이제는 무릎이 시려서 못 입을 때, 나팔바지, 고리바지, 배바지… 지나간 패션들은 지나간 연인 못지않은 진한 향수를 풍기며 우리 앞에서 추억으로 사라져 간다.
현실(現實)
패션은 언어다! 때로는 수 많은 대화보다 더 큰 힘으로 상대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우리는 스카프 하나에, 타이 하나에, 구두나 가방을 고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전문가는 전문가 나름대로,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정장은 물론이고 주말에 편하고자 입는 캐주얼에도 그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세계가 들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미 패션이 우리에게 주는 기본가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갖가지 Jean을 꺼내어 놓고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현실화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놈이 그 놈 같은데 말이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나에게 집에 있는 여자친구는 ‘사춘기 딸’ 하나 두었다고 놀려대기도 한다.
십 수년 전, 한 의류 브랜드 광고 카피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입으로 하는 웅변, 옷으로 하는 웅변” 이라는 헤드라인으로 J,F.케네디의 명연설을 연상케 하는 그 광고. 우리도 선거철이 되면 대선 후보들의 헤어스타일, 넥타이나 정장의 컬러 등으로 Image Making이 회자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패션이 갖는 가공할만한 역할은 명실상부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욕망(慾望) 또는 그리움
패션이 갖는 또 하나의 가치는 우리에게 즐거운 욕망(慾望)을 선물한다는 것이다.
과감한 비키니 하나 걸어 놓고 바캉스에 맞춰 몸매를 다듬어 가는 무수한 10대, 20대 30대(?)들, 웨딩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날이 마치 웨딩의 D-Day인 양 다이어트에 몰입하는 예비신부들, 그리고 거리에 널린 수없이 많은 마네킨들의 유혹은 우리에게 모두가 그처럼 예뻐지고 멋있어 진다는 ‘착각의 늪’ ‘욕망의 늪’에 빠지게 만든다. 사실 어떻게 보면 패션의 반은 몸으로 입지만, 나머지 반은 마음으로 입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옷장 속에 걸어만 놓아도 배가 부른 옷이 있기 마련이니까!
이쯤 해서 광고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어릴 적 동화 속에서 청순가련형 사랑의 대명사로 남아있는 인어공주가, 하체는 종마의 말굽과 상체는 인간의 몸과 눈을 지닌 신화 속 켄타우루스(Centaurs)가 Levi’s를 들고 있다.
그리고 데코레이션 된 박스 안에는 “Find Your Fit”이라는 카피! 여기서 등장하는 ‘Levi’s’가 광고 속 ‘인어공주’나 ‘켄타우루스’의 것이라면 이것은 그녀들의 두 개의 발로 들과 산을 맘껏 달릴 욕망의 표현이고, 그녀의 마음 속에 애잔함으로 남아있는 어떤 왕자님의 것이라면 그것은 가슴 아픈 그리움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그것이 욕망이던 그리움이던 그녀가 발견해 들고 있는 Levi’s. 그리고 그 표정들로 미루어 짐작 하건대 그녀가 학수고대 찾고 기다리던 왕자님의 체취가 묻어있는 그리움의 소산물이 아닐까? 그의 Jean을 그녀가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욕망이던 그리움이던 Jean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가슴 아픈 멜로(Melodrama)에 까지 이르렀음에 나는 또 신선함을 갖는다.
광고는 지금까지 아무도 가보지 못한 무수한 길을, 심지어 아직 나지 않은 길도 만들어가는 상상이상의 힘이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